박종철 이한열 열사 6 10 민주항쟁 6월 항쟁

 

 

이한열 열사 이름만 들어도 가슴 한켠이 울린다. 6월의 항쟁에 선두에 서서 민주주의를 지킨 고귀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민주주의 또한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렇게 하늘로 아들을 먼저 보낸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가 전두환 자택을 찾아가 문전박대를 당한 사실을 아는가? 전두환 회고록을 보면 폭도들을 막은 군인들이라 칭하며, 지만원 박사의 말도 안되는 주장을 받을어 북한군인들이 시민들과 군인들 사이에서 이간질 시킨 거라며 종북의 실체라 이야기 하고 있다.

 

 

이한열 열사 프로필

 

생몰 1966년 8월 29일~1987년 7월 5일

 이한열 열사는향년 2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가족 이한열 열사 아버지 이병섭

이한열 열사 어머니 배은심

이한열 열사 학력 연세대학교경영학과 외 1건

 

 

박종철 프로필

 

박종철 생몰 1965년 4월 1일 ~ 1987년 1월 14일 (향년 22세) 1964년 4월 1일 부산 서구 아미동에서 박정기과 장차순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누나로는 박은숙이 있다.

 

박종철은 혜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3년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입학하여 대학 생활 동안 동아리 활동과 농촌 활동 등을 통해 사회의 모순에 눈을 떴다. 그는 1985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당시 농성지원 가두시위로 닷새간의 구류를 살았고, 여름방학에는 학출(위장취업)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86년 노학연대 투쟁에 활동하던 중 1986년 4월 1일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가두시위로 구속되어 과거 전력으로 인해 7월 15일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출소했다.

 

출소 이후에도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박종철은 언어학과 3학년으로 학생회장 지위를 달던 그는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 이 때 언론들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고 보도를 해 많은 비난을 받았다. 박종철치사 고문사건은 이한열 열사와 뗄려야 뗄수없는 사건으로 번진다.

 

 

1987년 광주..많은 사람들이 앞다퉈 연기속 발길을 돌리고 있을때 단 두명이 남아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바로 그중 한명이 이한열 열사다. 이 사진은 같은 대학교 학생 이종창에 의해 부축받은 채 피를 흘리는 이한열 열사의 모습이 담겨 있다. 결국 이 사진은 뉴욕 타임스 1면 머릿기사에 실렸고 또한 AP통신이 선정한 20세기 100대 보도사진에 선정되었다.

 

 

 

이한열李韓烈, 열사는 전라남도 화순군 출생으로 광주진흥고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하던 중 1987년 6월 9일 시위에 참여했다.

 

 

 

그런데 그 날 일부 전경이 최루탄을 수평으로 직사한 것이 뒷머리에 맞아 사경을 헤매게 되었고, 7월 5일에 만2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어마한 파장을 일으켰었는데, 뒤이어 이어진 한 학생이 정부의 폭력진압으로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5공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은 가중되었고, 이는 6월 항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한편 ‘잃어버린 시간을 찾습니다’ 캠페인에서 ‘6월 항쟁의 인연, 이한열과 손석희’ 라는 제목의 글을 게시했다. 글에 따르면 이한열 열사 어머니는 지난 1988년 손석희 앵커를 만났다고 한다. 이후  MBC 노동조합이 투쟁할 당시 격려차 MBC를 방문했다가 우연히 손석희앵커를 만난 것이다. 당시 손석희 앵커는 입사 5년 차였다한다.

 

 

 

이한열 열사 어머니는 손석희 앵커에게 “사람들이 자네랑 우리 한이(이한열 열사) 가 많이 닮았다고들 하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손 앵커는 “예 어머님. 그렇지 않아도 저도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고 답해드렸다.

 

 

 

그러자 이한열 열사 어머니는 “내가 한이한테 그렇게 데모하지 말라고 말리긴 했지만.."하며 말끝을 흐리며 "우리 한이가 살아있었다면 아마 지금도 손석희 저 양반처럼 살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며 “저렇게 열심히 살았을 것이다” 고 말했다고 한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7월 9일에 민주국민장이라는 이름으로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이 진행되었고, 훗날 국회의원이 되는 우상호 총학생회장이 민주국민장 집행위원장을 역임하였다고 한다.

 

 

(우상호 의원의 모습, 이한열 열사 장례집회의 선봉에 서며 미국 시사잡지에 실렸다)

 

 

 

우상호 국회의원은 시위 현장에서 이한열의 영정사진을 들고 선봉에 서기도 했다. 당시 장례식은 연세대학교 본관 → 신촌로터리 → 서울시청 앞 → 광주직할시 5.18묘역의 순으로 이동되며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추모 인파는 서울만 100만, 광주에 50만 등 전국적으로 총 160만 명이었다고 한다.

 

 

(당시엔 당연히 휴대폰도 없는 시절이라 이런 수기로 작성된 포스터형식으로 대항하였다고 한다)

 

 

 

( 당시 연설을 하던 문익환 목사의 모습)

 

이 때 문성근의 아버지인 문익환 목사는 아직도 대한민국 현대사의 명연설 중 하나로 꼽히는 연설을 하는데 바로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26인의 열사들의 이름을 부르짖는 것이었다. 여담으로 이 때의 인연으로 이한열 군의 어머니인 배은심씨는 우상호를 친아들처럼 여겨 왔다고 한다.

 

 

<당시 문익환 목사의 연설 전문>

 

"전태일 열사여! 김상진 열사여! 장준하 열사여! 김태훈 열사여! 황정하 열사여! 김의기 열사여! 김세진 열사여! 이재호 열사여! 이동수 열사여! 김경숙 열사여! 진성일 열사여! 강성철 열사여! 송광영 열사여! 박영진 열사여! 광주 2천여 영령이여! 박영두 열사여! 김종태 열사여! 박혜정 열사여! 표정두 열사여! 황보영국 열사여! 박종만 열사여! 홍기일 열사여! 박종철 열사여! 우종원 열사여! 김용권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거의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연설이었으나 효과는 엄청 났고, 지금도 듣다보면 소름이 끼치는 명연설이다. 또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연세대 정문 앞에서 한풀이춤을 추던 서울대 이애주 교수 역시 인상을 주었다.

 

 

 

(민중미술가 최병수씨의 걸개그림)

 

 

이한열 열사의 장례를 치를 때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걸려 있다. 이 그림의 높이가 중앙도서관의 높이와 거의 같다. 현재 연세대학교에 보관중이며 6월 9일 무렵 중앙도서관에 걸린다.

 

 

 

문성근 아버지 문익환 목사의 연설은 목소리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운구 행렬 이후 서울시청 광장에 남은 백만여 명은 연좌집회를 열었고 '전두환 퇴진', '청와대 진격'을 외치며 6.29 선언에 주저앉지 말고 전두환 퇴진을 위해 항쟁을 계속하자고 하며 민주주의 항쟁이 일어났다.

 

 

 

군중들은 일제히 서울시청에 "조기", "조기"를 외치며 조기를 달 것을 요구해 이는 곧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장례위원회도, 국민운동본부 지도부도, 서대협도 백만 인파가 모인 것을 예측하지 못한 까닭에 군중들은 광화문 4가 쪽으로 방향을 돌렸으나 광화문 4가 쪽을 방어하던 경찰 병력이 다연발 최루탄을 발사하자 결국 군중들은 흩어지고 말았다. 6월 항쟁은 그것으로 막을 내렸다.

 

 

 

현재 6월 항쟁을 다루는 영화 '1987'이 제작되고 있다고 한다. 김윤석, 강동원 등이 나온다고 하는데, 문제는 강동원이다. 강동원이 이한열 역을 맡았다는데, 강동원의 외증조부 이종만이 친일반민족행위자이기 때문이다.

 

 

 현재 네이버 영화 사이트의 '1987' 영화의 평점은 이 때문에 "친일파 후손이 이한열 열사 역을 맡다니!" 라며 1점을 주는 사람들과 "본인이 외증조부 친일파 논란에 대해 사과했고 반성했다. 본인이 친일파 자손 되고 싶어서 태어났냐? 앞으로의 본인 행실을 보고 판단하면 된다." 라며 10점 주는 사람들의 키보드 배틀인 키배가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영화 평점이 개봉하기도 전에 6점대를 달리는 등 영 좋지 않다. 하지만 1점을 주는 사람들 중에 "강동원이 친일파 후손인 주제에 독립운동가 역할을 맡는다니!" 라며 잘못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섞여있다. 솔직히 영화제목만 봐도 시대 유추할 수 있겠지만 1987년이 일제강점기가 아니다.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학생으로 재학 중이던 이한열 열사 생전의 모습)

 

이한열 열사는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민주열사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이한열 열사 또한 이러한 분쟁을 원치 않을 거라 본다.

 

 

이 슬픈 이야기가 그리고 숭고한 이야기가 다 담겨 있는 사진 한장으로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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