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 운동 숨은 이야기 전두환 회고록

 

 

29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에서는 37년이 지난 5.18 광주민주화 운동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필자가 이 늦은 시각 포스팅을 하는 이유도, 그것이 알고싶다 전두환 회고록에 대한 검증과 진실편을 직접 시청한 후에 포스팅을 하기 때문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라고 표현하기도 싫은 전두환 씨가 회고록을 낸 이유가 무엇이고, 회고록의 내용에 자신이 참회를 진정 하고 있는지는 나왔을까? 필자는 적어도 조금의 뉘우침이라도 있을 줄 알았다.

 

 

전두환 씨는 정말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관련이 없을까. 우리같으 일반인이 들으면 말도안되는 소리하지 말라고 할테지만 아직까지 이것이 북한군에 의해 시발된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무엇보다 위험하다고 생각했던건, 잘못된 정보를 알고 인식하고 있는 자들보다, 이러한 강압적 폭력과 국민들을 총으로 쏴죽인 행동을 한 전두환과, 이희성 전 사령관등은 자신들은 이 일에 전혀 무관하다고 일관하는 정도가 아니라, 광주 일반 시민들을 무장공비 간첩으로 칭하기도 했으며, 시위대가 먼저 총으로 군인을 쐈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당시 12.12 사태를 무력으로 일으킨후 5.18 민주화를 철저하게 억압한 후 적들을 물리쳐야만 받을 수 있다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가는 무공훈장을 전두환은 받게된다. 그니까 광주시민 즉 우리국민들에게 총을 쏘고, 곤봉으로 목숨을 뺏은 것을 적을 처단했다고 간주하고 훈장을 받은 것이다.

 

 

전두환 회고록에서는 광주 5.18 민주화운동이라 칭하지 않는다. 두리뭉실하게 5월에 자행된 시위대를 향한 살상 행위는일체 일어나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전두환 회고록 책 내용'광주에서 양민에 대한 국군의 의도적이고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쓰여있었다.

 

 

 

1980년 5월 17일,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이튿날인 5월 18일 오전부터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가 학생과 시민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다치고 죽어가자 시민들은 저항하기 시작했다.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 모인 10만의 시민들은 비무장 상태로 계엄령 해제와 전두환 퇴진을 요구했다. 그 때 시민들을 상대로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일어났다.

 

 

 

수많은 시민들이 속수무책으로 총격에 쓰러졌다. 심지어 시신을 수습하려던 시민들이나 임산부와 어린이 등 무고한 민간인들 역시 비참하게 희생됐다.

 

 

 

국민을 지켜야 할 군대가 국민을 향해 총격을 가한 충격적인 상황. 5월 27일 계엄군이 도청에 재진입하기까지 열흘 동안 확인된 사망자는 160여 명이고, 부상자는 5000명에 육박하며, 암매장되거나 실종된 이들의 숫자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포함하면 상상도 못할만큼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것이다. 이게 518 민주화 운동의 진실이다.

 

 

그러나 광주에서의 최초 발포명령자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시민들의 무력시위에 맞선 자위권의 발동이었다는 전두환 회고록의 주장은 과연 정당할까?

 

 

 

당시 나이 23살 앞으로 살아가기에 너무나도 창창한 꽃다운 나이에 고 최미애 씨는 목숨을 잃었다. 이유는 군인이 쏜 총에 의해서였다.

 

 

이를 목격한 최미애 씨 어머니는 자신의 딸을 죽인 진범을 찾을 생각도 하지못한채 공포에 떨며, 자신의 딸의 초상을 치를 때 조차 대문을 잠가놓고 치렀다고 한다. 어미의 심정으로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싶었는데, 고 최미애 씨의 어머니가 가슴에 딸을 사무치고 무덤덤하게 말씀 하시는 모습이 더욱 애잔해 보였다.

 

 

 

이 뿐만이 아니다. 어린 나이에 군인의 총에 맞아 안구를 척줄해야만 했던 젊은 여성은 이제는 할머니가 되었다. 하지만 그간 군부대에서나 국가에서나 보상은 커녕, 조그만 사과조차 받지 못하고 있었다.

 

 

 

수많은 시민들이 속수무책으로 총격에 쓰러졌다. 심지어 시신을 수습하려던 시민들이나 임산부와 어린이 등 무고한 민간인들 역시 비참하게 희생됐다. 국민을 지켜야 할 군대가 국민을 향해 총격을 가한 충격적인 상황은 그 누구도 그 어떠한 시민과 교육자들도 예상하지 못했다.

 

 

 

전두환은 이렇게 신군부의 핵심인물로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하며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무자비하게 탄압한 뒤 권좌에 올라 7년의 재임기간 동안 반대자들을 철저히 억눌러왔다. 민정당이 정권 연장에 성공하하며 그가 저지른 집권 과정의 불법행위와 재임 중의 폭압적인 통치행위에 대한 책임을 면하는 듯 했으나 결국 법적 처벌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전두환은 군사 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그리고 권력형 비리에 대한 재판을 거쳐간다. 또 '반란수괴죄', '상관살해죄', '내란수괴죄', '내란목적살인죄', '뇌물죄'등 12개 항목의 혐의가 인정돼 결국 전두환은 1996년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2심에서 무기징혁을 받으며 국민들은 전두환에게 심판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며 광주의 희생자들이 눈을 편하게 이제는 감을 수 있길 바랐다.

 

 

 

 

 

그러나 그건 지식인들의 큰 오판 아니었나 싶다. 김영삼이 대통령에 취임하고난 후 얼마 있지않아 뒤이어 정치적 사면이 단행되어 단 8개월만에 수감생활을 끝내며 나온다. 당시 전두환 씨의 촬영 인터뷰를 보면 정말 가관이다. 당시 나온 그는 국민들의 사랑에 진실이 반영된 결과에 감사하다며 웃으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전두환은 자신이 해왔던 광주 사태에 대해 37년 만에 논란의 회고록을 출간했다. 하지만 당연히 거기에 518 민주화 운동이란 표현은 온데 간데 없었다.

 

 

 

(지만원 또한 광주에는 민주화 시위대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오로지 북한 특수군이 와서 일으킨 폭동 사태라 하였다. 그것도 600명 간첩 무장공비가 내려온 것이라는 것이다. ㅎㅎ 기가차서 웃을 일이다. 북한 특수군이 넘어왔다며 발표한 날, 우리 대한민국은 북한에 이러한 일에 대해 전혀 항의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전두환 또한 자신의 회고록에 여전히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없었고 자신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과 전혀 무관하다고 회고록을 통해 주장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회고록에서 이른 바 북한군 침투설을 제기한 것이다. 이는 지만원의 이야기와 일맥상통한 것으로, 전두환이 5·18 당시 600명의 북한군 특수부대가 남침해 대한민국의 전복을 시도했다는 지만원 씨 등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무기를 탈취하고 군인들을 살해한 행위를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또한 자신은 광주화 사태와 무관하다고 이야기하면서도, 북한군을 진압하여 대한민국을 지켰다 하며, 광주 5.18사태의 피해자라고 까지 이야기를 한다. 또한 시위대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한 자위권이 발동한 것이라며 시민에게 총을 쏠 수 밖에 없었다고 감옥을 갔다온 뒤에까지 이렇게 밝힌다.

 

 

그러나 광주에서의 최초 발포명령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물음에는 여전히 함구하고 있는 전두환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시민들의 무력시위에 맞선 자위권의 발동이었다는 전두환 회고록의 주장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전두환 회고록 中 '광주에서는 양민에 대한 국군의 의도적이고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5월 27일 계엄군이 도청에 재진입하기까지 열흘 동안 확인된 사망자는 160여 명이고, 부상자는 5000명에 육박하며, 암매장되거나 실종된 이들의 숫자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당시 11공수여단 계엄군 이근우 씨의 모습. 방송에 나오 이근우 씨는 광주사태의 최초 발포명령자를 찾는 건 사실 너무나도 간단하다고 설명하며, 그 당시 결정권자는 육구 참모총장인 이희성과 전두환 보안사령관 이 둘 뿐일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

 

 

 

또한 이날의 광주에서는 헬기까지 동원되었다. 광주 병원에서는 총에 맞아 목숨이 위험하여 환자들이 복도까지 줄을 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수혈이 필요한 자들이 넘처나자, 이에 헌혈을 하기 위해 시민들은 자원하여 줄을 서고 있는 상황에 갑자기 헬기가 동원되어 기관총을 난사했다. 지금까지 병원에 나아있는 총탄의 흔적은 100여발이 넘는다.

 

"그날 분명히 헬기 동체 좌측에 장착된 그 기관총이 뿜어대는 것을 봤어요" 헬기 사격 목격자 최형국씨는 이렇게 말했다.

 

 

(민주화는 무슨 민주화요 엉터리같은 이야기지 라며 다소 분노를 표출하며 이야기 하고 있던 이희성 전 장군의 모습. 이희성 씨는 90살을 넘긴 나이에도 꽤 정정한 모습을 보여줬다. 또 그의 말 중 충격적이었던 것은 자신은 이미 그때의 벌은 다 받았다고 한것이다. 그가 말한 벌이란 전두환과 함께 8개월간 감옥에 다녀왔다는 것. 이런 이들이 대한민국을 이끌었다니 눈물이 앞을 가릴정도로 창피한 현대사의 한부분 아닌가 싶다)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 민주화문동은 무슨 이라며 2003년도에 인터뷰를 하고 있는 전두환 씨)

 

 

이번 그것이 알고싶다 전두환 회고록 편에서 가장 슬펐던 것은, 고 김경철 씨의 이야기다. 고 김경철씨는 5월 광주사태 최초의 희생자중 하나다. 그의 어머니는 그 당시의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분통이 터지며 너무나 가슴이 아파 잠을 못 이룬다고 한다.

 

 

바로 자신의 아들이 군부대의 진압아래 곤봉으로 집단 린치를 당하며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고 김경철 씨는 친구들과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온 뒤 갑작스럽게 이러한 사태를 맞이한 것이었고 영문을 모르는 김경철 씨는 이러한 일이 자행되는 동안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고 한다. 그러나 군인들은 "이 XX가 어디서 감히 어디서 대들어"하며 더욱 심하게 구타를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더 충격적이고 그의 어머니께서 더 가슴아플 수 밖에 없는 것은 고 김경철 씨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던 장애인이었다는 것이다. 아무 이유도 알지못한채 공포에 떨며 맞아죽어가던 아들을 생각하며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는 어머니의 인생은 산지옥이 따로 없지 않을까?

 

 

이번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지 못하신 분들은 꼭 정말 꼭 한번 보시기를 당부드린다. 필자 나름대로 이번 그알의 방송에 대해 담아내려고 많이 애썼지만 한시간 분량의 방송을 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바쁘셔서 못보시는 분들에겐 필자의 포스팅이 많은 참 역사를 아는데 도움이 되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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